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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조경학 기반 재난 대응형 조경 공간과 회복 시나리오 설계
재난 시대의 조경학, 공간을 넘어서는 전략
기후위기, 도시 밀도 증가, 인프라 노후화 등으로 인해 재난 발생 빈도와 강도는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도시 공간은 더 이상 '정적 설계(static design)'로는 대응할 수 없으며, 탄력적이고 회복력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때 조경학은 재난 전, 중, 후 단계에서 공간이 수행해야 할 기능을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학문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재난 대응형 조경(disaster-resilient landscape)'이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재난 대응형 조경은 단순히 재해 방지 수단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긴급 상황에서의 대피, 재해 후 회복, 공동체의 감정적 안정 등 복합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 전략이다. 조경학적으로 이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재난 모의 시나리오(planning scenarios), 사회적 기반 조경(social infrastructure landscape) 등의 이론에 근거하여 설계된다. 또한 도시기후적응전략(Urban Climate Adaptation)과 복합재난 대응계획(Multi-hazard Planning) 등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특히 United Nations Office for Disaster Risk Reduction(UNDRR), World Bank, IFRC 등에서 제시한 도시 회복 시나리오 모델에서는 조경 공간이 비상대피소, 임시 쉼터, 커뮤니티 재건 장소 등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 조경학의 설계 전략으로 통합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조경학 시각에서의 재난 대응형 조경 설계 원리, 사례, 이론적 배경, 회복 시나리오 구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조경학 관점의 재난 대응형 공간 설계 원리
1. 다기능성(Multifunctionality) 기반 공간 구성
재난 대응형 조경 설계는 평상시와 재난 시 모두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이중 목적 공간(dual-purpose space)' 개념을 전제로 한다. 이는 조경학의 '다기능적 경관(Multifunctional Landscape)' 이론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공원, 광장, 놀이터로 사용되지만 재난 발생 시 대피소, 응급 집결지, 구조 장비 이동 경로 등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조경학에서 이는 "공간의 전환성(transformability)"이라 하며, 공간이 특정 목적에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기능을 바꿀 수 있도록 유연하게 구성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식재 구조, 배수 체계, 보행 경로, 기반 시설 등을 사전에 계획 단계에서 통합적으로 설정해야 하며, 예를 들어 도시 중심부의 저류 공간을 평소에는 수변공원으로 활용하고, 폭우 시에는 물을 흡수하고 저장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대표적인 전략이다. 이는 '레질리언트 그린인프라(resilient green infrastructure)'로 분류되며, 자연 기반 해법(Nature-based Solutions, NbS)의 핵심 개념과도 일치한다.
2. 경관 회복력 기반 시나리오 설계
재난 대응형 조경은 단순히 물리적 인프라 확보에 그치지 않고, 복구와 회복에 초점을 둔 시나리오 기반 설계가 필수적이다. 조경학에서는 이를 '경관 회복력(Landscape Resilience)'이라 명명하며, 자연재해 이후에도 경관의 기능과 구조가 유지되거나 자생적으로 복구될 수 있도록 계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력 설계는 하향식(top-down) 계획이 아닌, 현장 기반(bottom-up) 시나리오 기획이 핵심이다.
예컨대 지진 발생 시 녹지의 식재 밀도에 따라 낙하물 피해가 완충될 수 있고, 대피 경로 주변의 식생 피복이 시각적 안정감과 방향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존재한다. 이는 Kaplan의 회복 환경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과 Ulrich의 스트레스 저감 이론(Stress Reduction Theory)과도 연계되어, 조경 공간이 재난 이후 정서적 회복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조경학 기반 재난 대응형 공간의 국내외 사례 분석
1. 선진국 도시의 조경 중심 재난 대응 사례
재난 대응형 조경 설계는 이미 세계 여러 도시에서 실현되고 있다. 미국 뉴욕의 '헛슨 야드(Hudson Yards)' 프로젝트는 평상시에는 고밀도 상업·주거 지역이지만, 대규모 홍수나 폭우 시에는 수분 저장과 우수 배출 기능을 갖춘 저류형 공원 공간으로 변환되도록 조성되었다. 이는 조경과 수공간의 융합 설계 사례로, 도시 기반시설의 복원력 강화를 위한 선진 전략으로 평가된다.
또한 일본 고베시는 1995년 대지진 이후 재난 회복형 공공공간 설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특히 '히가시 유엔치 공원'은 비상대피소 기능과 지진 추모 공간, 방재 훈련장, 휴게 광장이 통합된 다기능형 조경 공간으로, 조경 설계를 통해 사회적 기억과 회복이 접목된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는 조경학에서 말하는 ‘기억의 경관(Memoryscape)’과 ‘회복의 장소(Place of Healing)’ 개념과 연계된다.
2. 국내 조경 기반 재난 공간 적용 사례와 한계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시 '재난 대비 도시공원 조성 지침'에 따라 일부 근린공원, 어린이공원, 문화공원이 재난대피소 기능을 겸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숲'은 평상시에는 생태·문화공원이지만, 지진 및 풍수해 발생 시 대규모 대피 공간으로 기능하도록 동선, 식재, 광장 구성이 설계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국내 재난대응형 조경은 구조물 위주로 기능이 집중되고, 경관과 생태, 정서 회복 기능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실제 재난 발생 시 사용성 평가, 시민 심리 안정 효과, 통합적 공간 전환성 등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경학적 설계 이론이 체계적으로 반영된 공공공간 사례의 확대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전략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해외 사례 국내 사례 조경학적 평가 수해 대응 뉴욕 Hudson Yards 안양천 수변공원 수리적 저류 기능 확보 수준 차이 큼 지진 대응 고베 히가시 유엔치 공원 서울숲 기억·정서 치유 설계 도입 필요 폭염 대응 바르셀로나 Superblock 양재 시민의 숲 열섬 완화 기능 강화 필요 조경학 관점의 재난 회복 단계별 조경 시나리오 설계 전략
1. 사전 예방: 공간 분산과 재해 저감형 설계
재난은 예고 없이 발생하지만, 그에 대비한 설계는 사전에 가능하다. 조경학은 재난 예방 차원에서 도시 구조와 경관 요소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를 분석하고 제안하는 학문이다. 재난 발생 시 가장 큰 피해는 인구 밀집 지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조경 설계 초기 단계에서부터 인구 밀도 분산형 공간 구조를 계획해야 한다. 예컨대 대규모 광장, 다기능 공원, 가변형 열린 공간 등은 재난 시 집결지로 기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는 여가와 생태 서비스 기능을 수행한다.
이와 함께 ‘생태 완충지대(ecological buffer zone)’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도시 외곽이나 하천, 저지대 주변에 식생 밀도가 높은 녹지를 계획해 홍수, 산사태, 폭염 등의 자연재해로부터 도시를 완충할 수 있다. 조경학 이론 중 '그린 인프라스트럭처(Green Infrastructure)'와 '도시 회복력 설계(Urban Resilient Design)'가 이를 뒷받침하며, 실제 도시기반시설계획에 자주 반영되고 있다. 이때 생물다양성과 기후 적응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식재 계획이 요구된다.
2. 재난 발생 시: 유도형 동선 설계와 안전 커뮤니케이션
재난 발생 순간 조경 공간은 물리적 회피처로서뿐 아니라, 사용자의 방향 감각과 심리적 안정을 동시에 제공하는 인지적 인프라로 기능해야 한다. 조경학에서 말하는 '인지 경관(cognitive landscape)'은 이러한 상황에서 경관의 색채, 질감, 패턴 등이 사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준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축선형 동선, 상징 식재, 고유한 패턴과 색상 등을 통해 시각적으로 명확한 피난 유도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스마트폰 등 ICT 기기를 활용한 디지털 경관 커뮤니케이션 기법도 적용 가능하다. 사물인터넷(IoT)을 기반으로 한 실시간 대피 알림, 가변형 조명과 경관 표지판은 공공 공간 내 조경 요소와 결합되어 재난 상황에서 높은 유용성을 가진다. 특히 도시 공원, 대규모 광장, 문화시설 인근 공간에서는 다중 이용자를 고려한 신호 체계, 유도 화살표, 쉘터형 쉼터 배치 등도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3. 재난 이후: 회복력 기반 커뮤니티 정원 설계
재난이 종료된 이후의 조경 공간은 단순 복구가 아니라 '정서적 회복과 사회적 복원의 공간'으로 기능해야 한다. 조경학의 '회복 경관(restorative landscape)' 이론은 환경심리학과 연계되어 PTSD, 외상 후 불안 장애, 트라우마 회복 등 심리적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다. 회복 정원(Healing Garden), 메모리 스케이프(Memoryscape), 공동체 중심 재배치형 조경 설계가 대표적 전략이다.
공원, 정원, 학교 주변 녹지는 커뮤니티 활동과 연결되어야 하며, 예술과 식물의 접목, 텃밭 가꾸기 활동, 커뮤니티 정원 참여 등으로 회복성과 공동체 응집력을 함께 증진할 수 있다. 정원 공간의 질감, 향기, 소리, 햇빛, 바람 등 다양한 감각 자극 요소를 통합하는 '다감각 치유 경관(multisensory therapeutic landscape)' 설계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더불어 이러한 설계는 향후 도시 회복의 기초 자료로서 기능하며, 시민 경험 기반 피드백 구조를 통해 장기적으로 도시 회복 전략 수립에 반영될 수 있다.
조경학에서 본 재난 대응형 공간의 지속가능성 평가와 관리 체계
1. 장기 유지관리 기반의 설계 체계
재난 대응형 조경 공간은 설치 이후의 유지관리가 성패를 가른다. 단순한 일회성 대응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경관 체계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조경학적 유지관리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 '경관 유지관리(Landscape Stewardship)'은 경관의 생태적, 사회적 기능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관리 전략으로, 관리 주체, 예산, 기준, 평가 도구를 모두 포괄한다.
예를 들어 식생 유지계획, 배수 시스템 관리, 쉘터 구조물의 정기 점검, 재난 장비의 저장 장소 관리 등이 포함된다. 미국 FEMA의 방재공원 가이드라인은 시설 설치뿐 아니라 유지관리 계획서를 사전에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기준이 국내에도 정착될 필요가 있다. 또한 수목 생육 모니터링, 기상데이터 기반 관리, 빅데이터 기반 이상 징후 파악 등도 IoT와 접목된 조경 관리 기술로 발전 중이다.
2. 다기관 협력 기반의 운영 모델
현대 재난은 복합적이며, 단일 부서나 단일 전문가 집단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조경학은 도시계획, 보건, 환경, 사회복지, 정보기술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통합적 회복 거버넌스(Integrated Recovery Governance)’ 모델이 요구된다. 이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공공 부문, 민간 기업, 지역사회, 시민이 함께 참여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이다.
예컨대 지자체는 기반 인프라와 예산, 민간 기업은 기술적 설계와 운영 시스템, 시민은 실사용자 피드백과 자원봉사자로 참여함으로써 전체 시스템이 순환된다. 조경 설계자는 이들의 협업을 공간 구조와 운영 전략에 통합하는 '조정자(coordinator)'이자 '디자이너'로서 기능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재난 대응형 조경은 단순한 피난 공간이 아니라 도시 레질리언스를 내재한 전략적 자산으로 전환된다.
미래 조경학에서 재난 대응형 경관의 통합적 설계 방향
1. 디지털 기반 조경 대응 시스템의 융합
조경학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재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 중심 설계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AI와 GIS 기반의 재난 예측 시뮬레이션은 지형, 기후, 인구, 동선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최적 피난 경로와 공간 배치를 도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디지털 트윈 도시(Digital Twin City)' 기반 조경 전략이 수립되고 있다. 이는 재난 발생 전후 시민 훈련, 가상 대피 시뮬레이션, 응급 구조 동선 가시화 등의 방식으로 구현된다.
예를 들어, 사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특정 공원의 저지대는 침수 위험이 높으므로 고지대에 피난 쉘터와 조명 시스템을 설계하거나, 야간 대피 시 자동으로 점등되는 유도등을 설치하는 식이다. 이와 같은 조경학적 접근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서 공간 그 자체가 반응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한다. 향후에는 AI가 재난 상황에서 기후와 인구 밀도를 분석하여 실시간으로 경관 구조를 조정하는 자동 반응형 조경도 가능해질 것이다.
2. 교육, 문화, 복지 인프라와의 연계 설계
재난 대응형 조경은 단순히 긴급 상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삶 속에서 유익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조경학은 교육, 문화, 복지 인프라와 연계된 다기능 조경 공간 설계를 지향한다. 예컨대, 도서관 옆의 소규모 공원에 방재 교육 부스와 재난 체험 정원을 조성하거나, 복지센터 내 열린 광장을 다목적 쉘터로 설계함으로써 공간의 일상성과 위기 대응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조경학에서는 이를 ‘하이브리드 경관(Hybrid Landscape)’으로 정의하며, 기존의 단일 목적 공간을 다층적 기능이 가능한 복합 공간으로 전환하는 전략이다. 이는 사용자의 생활 동선 속에서 자연스럽게 위기 대응 공간을 인지하게 하며, 도시 전체에 분산된 재난 대응 거점을 구축하는 데 효과적이다.
결론적으로 조경학 기반의 재난 대응형 공간은 미래 도시의 핵심 전략으로 기능하며, 생태·기술·사회 시스템을 통합한 총체적 설계가 요구된다. 조경학은 공간을 넘어, 시스템을 설계하고 거버넌스를 구축하며,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실천적 학문으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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